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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프로젝트 Ⅱ - 25개의 한강다리

 

 

한강프로젝트 Ⅱ - 25개의 한강다리

 

- 이득영 개인展 -

 

 

방화대교

 

 

쿤스트독

 

2008. 2.22(금) ▶ 2008. 3.13(목)

오픈닝 : 2008. 2.22(금) 오후 6시

작가와의 대화 : 2008. 3. 1(토) 오후 5시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22-9 | 02-722-8897

kunstdoc2006@yahoo.co.kr

 

 

공사중마곡대교

 

 

한강다리의 상판은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미세하게 떨린다

 

이영준 <기계비평가>

 

서울에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한강에 다리가 많이 생겨나면서부터이다. 그러니까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 대교)나 제3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가 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격차는 크지 않았으며, 강남이라는 것이 특정한 지리적 기표도 아니었다. 강남이 강남이 된 것은 동호대교와 성수대교가 놓이고 나서의 일이니,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연결의 역할을 해야 할 다리가 단절의 역할을 하게 된 건지는 다리를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는 강북사람과 강남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거지 양쪽이 서로 다른 나라가 되라고 다리를 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결의 기능을 갖는 것들은―문이든 필터이든 회로부품이든 메신저이든 철도차량의 연결기이든―동시에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은 모든 연결장치의 숙명이기는 하다. 연결의 장치들은 연결과 단절이라는 변증법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결을 사이에 두고 연결을 통하게 하려고, 연결을 뺏으려고, 연결을 막으려고 울고 웃고 싸운다.

그런 점에서 한강의 다리들도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상상력을 사로잡은 일본만화 요괴인간의 에피소드 중에 '죽음의 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문 저쪽은 죽음의 세계다. 그런데 죽음의 문은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가지 한가운데 있다. 누구든지 그 문을 통과하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의 엄마가 문 저쪽에서 아이를 부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로2가에서 3가로 가면 바로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이는 죽음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죽음의 문을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벰, 베라, 베로가 힘을 합쳐 싸운다는 것이 만화의 내용이다. 지금의 성수대교와 동호대교가 바로 죽음의 문이다. 요 두 다리를 건너면 와인값도, 물담배 값도 두 배로 뛰니 말이다. 요 다리 남쪽에서는 페라리에서부터 벤틀리까지, 세계의 희귀한 차들을 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차들은 절대로 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강북은 노면이 하도 안 좋아서 벤틀리의 바퀴가 닿는 순간 터져 버리는 모양이다. 아니면 강북의 건물들은 하도 칙칙해서 페라리의 새빨간 색도 칙칙한 물이 들을까봐 그러는 건지. 400마력의 V12기통 엔진을 단 이 차들이 돌아다니는 범위는 논현동, 신사동, 청담동 정도이다. 답십리나 갈현동 같이 생활형 인간들이 사는 강북 동네는 절대로 안 간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벤틀리나 페라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강남적 현상인 것이다. 즉 강남이라는 경제적, 역사적, 지리적 현상이지 엔진과 트렌스미션과 브레이크가 달린 자동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바꿔 말 하면, 강남을 이루는 수 많은 기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청담동에 가면 루이 뷔통샵이 청담동의 독특한 기표를 이루고 있듯이 말이다. 한강다리가 하는 역할은 그 차들이 지저분하고 좁고 못 사는 강북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연결이 아니라 차단인데, 가뜩이나 막히는 교통은 아주 자연스레 차단의 명분을 주고 있다.

 

 

성산대교

 

 

그런데 그 다리들이 힘을 합쳐서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리는 연결의 역할을 하지만 다리들끼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물론 다리들은 강변북로와 올림픽 대로로 연결돼 있기는 하지만 그 연결은 혼잡시간에는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지고 시간도 많이 걸리다가, 한가해지면 쉬워지기도 하는, 매우 유동적이고 단절적인 연결이다. 즉 아무 때나 쓸 수 있도록 확보되어 있는 연결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많은 운전자들이 끊임 없이 교통방송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느 다리를 가고 어느 다리를 포기할 것이냐를 고민한다. 다리들은 제각각이다. 불연속적 연결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강 양안의 맥락도 그렇고, 다리의 설계사상도 그렇고, 각각의 역사도 그렇고 다 제각각이다. 즉 다리들은 통일체가 아닌 것이다. 누군가 <한강의 다리들>이라는 책을 쓰려면 그는 완전히 분절된 다리들에 대해 써야지, 다리들에 어떤 통일된 원리들이 있는 듯이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다리의 구조가 다름은 말 할 것도 없다. 서강대교와 올림픽 대교는 사장교이며, 청담대교는 유일하게 위아래층에 전철과 자동차가 따로 다니도록 기능적으로 분리된 복층구조로 되어 있다. 한강대교는 성수대교가 가지고 있는 그런 단절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용산에서 한강대교 건너서 흑석동 갔다고 해서 세상이 확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수동에서 청담동으로 건너갔을 때 만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수대교는 붕괴의 아픔을 품고 있다. 성수대교를 그 옆의 영동대교와 가까이서 비교해 본 사람이라면, 붕괴의 트라우마가 이렇게도 강렬하게 물리적 구조에 남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젓가락 같이 가느다란 영동대교에 비하면 성수대교는 상판이나 교각이나, 콘크리트 구조나 철골구조나 엄청나게 비대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붕괴의 트라우마 때문에 필요강도를 훨씬 초과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동대교도 일단 붕괴가 되야 보강이 될까?

이런 모든 복잡한 사정들이 가뜩이나 무거운 다리의 상판에다 너무 무거운 내러티브와 역사와 가치와 증오를 부여해 왔다. 어떤 때는 유리창을 깨끗이 닦고 세상을 보고 싶듯이, 사물에서 내러티브나 가치판단이나 이념들은 판단중지의 괄호 속에 넣어두고 맑은 눈으로 대상을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이득영이 택한 방법은 객관적인 사진으로서의 항공촬영이다. 그의 작업은 사진을 객관적으로 찍는다는 것이 얼마나 물리적으로 힘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객관성을 둘러싼 담론적이고 이념적인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흔히 평론가들이 사진전시 서문 쓸 때 "사진은 단순히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라고 시작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이 도대체 카메라를 들고 사물의 외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사물의 아주 단순한 외양을 말이다. 객관적인 사진을 위해 데카르트 이후의 선원근법의 철학과 디드로의 사물의 체계에서부터, 오늘날 피터 갤리슨의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논의까지 숟한 담론적 준비가 필요 했었다. 객관성은 거저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오류와 편견을 극복하고 얻어낸 고지이다. 피터 갤리슨은 말한다. "객관성이란 말을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다. 어제는 이념이었다가 오늘은 편견이 되기도 하고, 매일 매일 그 정의가 바뀐다"고. 이득영도 자신의 한강다리 사진을 객관적으로 찍어내기 위해 바로 이런 역사적 과정을 응축하여 스스로 겪어야 했다.

 

 

양화대교

 

 

그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다리들을 찍었는데, 헬리콥터가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전지적인 시점은 쉽게 객관적인 시선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시간에 사용료가 백팔십만원이나 하는 헬리콥터를 세 내기 위하여 그는 기금을 신청하여 받았으며, 다리의 형태를 왜곡 없이 찍기 위하여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적절한 초점거리와 피사체간 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 헬리콥터의 문짝을 떼어 내고 언 손을 녹여가며 찍었다는 얘기는 좀 신파조 같이 들리지만 원래 항공이란 산뜻하고 날렵하고 초월적인 외양과는 달리 대단히 위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일이라는 것만 말해두자. 헬리콥터에서 사진 찍는다는 것이 자동으로 주어진 인스턴트식의 시선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은 형태의 왜곡이 없도록 다리의 바로 위에서 직각으로 찍었으며, 그를 위해 가장 적절한 초점거리의 렌즈를 썼으며, 사진 찍은 위치는 GPS를 이용하여 정확한 좌표값을 얻어 두었다. 이제 한강 다리는 이득영이 짜 놓은 데이터의 그리드로부터 도망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객관적인 사진을 통하여 한강 다리는 그 가장 풍부한 면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득영의 사진과 반대극에 있는 것이 아마추어들이 흔히 찍는 서정적인 한강 다리의 모습일텐데, 밤의 조명을 받아 휘황하게 빛나는 한강다리를 장노출로 잡아 화려한 색채 속에 주관적인 느낌을 극대화한 사진에서는 풍경을 묘사하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외관 뒤에는 아주 빈곤한 내용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반대로, 객관적인 이득영의 사진은 한강 다리를 매우 풍부한 대상으로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강 다리라는 대상이 원래부터 풍부하고 복잡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사진은 왜 그런 것을 보지 못할까? 주관적인 사진은 한강 다리의 교량공학적, 도시공학적, 도로공학, 건축적, 수리학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낭만적인 측면만 보기 때문이다. 다리란 위의 여러 가지 공학적 지식의 복합체이며, 그런 한에서 감각적, 지적인 흥미의 대상이다. 특히 교량공학을 빼고 다리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수 없다. 다리는 트러스교의 경우는 장간의 길이, 보와 교각의 형태, 사장교의 경우는 주탑의 형태와 케이블의 길이, 그것이 묶인 형태 등에 의해 아름다움을 띠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공학적 요인들을 무시하고 다리를 설계해 보았자 물리적으로 버티지 못하므로 소용이 없다. 다리의 아름다움은 선박이나 항공기의 아름다움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 아름다움은 구조의 부산물이지만 아름다움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들을 능가한다. 그런 아름다움은 사물의 피상적인 외관만 보는 주관적인 시선에는 아예 드러나지 않는다.

다리가 가진 풍부한 구조와 구성의 아름다움은 다리 자체의 구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기본적으로 강 양쪽의 땅과 닿아 있는데, 서울의 다리들은 그 양쪽에 참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맥락들을 품고 있고, 그것이 이득영의 사진에 풍부한 내용을 제공해 준다. 한강대교는 땅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김포대교는 어디부터 다리로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긴 램프가 땅에서 떠서 연결되어 있고, 성수대교는 극도로 복잡한 램프와 진입로의 형태를 보여준다. 가양대교의 북쪽 끝은 숲이고, 동호대교의 남쪽 끝은 아주 혼잡한 압구정동이다. 영동대교 북단은 아주 조밀한 가내수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흡사 어류도감을 보며 어떤 종은 비늘이 무지개색을 띠고 있고 어떤 종은 등지느러미가 길며, 어떤 종은 수염이 나 있다는 식으로 각각의 종의 형태의 디테일들을 눈으로 즐기듯이, 이렇게 다양한 개별 다리들의 메트릭스들은 우리에게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인지적, 정보적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대뜸 주관적인 시선을 들이대어 사물을 어설픈 감정으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구조와 힘과 균형과 맥락을 세세히 따라다닐 때 생기는 지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서강대교

 

 

이런 시선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잘 알다시피, 헬리콥터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떠 있는 하버링 (hovering: 한국에서 호버링이라 잘못 표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종사에게는 쉽지 않은 이 기동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장에서 병력을 투입하고 부상자를 후송하거나 북한산에서의 인명구조, 거친 북해에서 난파한 배에서 선원들을 구출하는 일 등, 주로 구조와 구출에 많이 쓰이고 있다. 다른 항공기로는 할 수 없고, 헬리콥터 만이 할 수 있는 착한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뻗어온 신의 구원의 손길 같이, 고립무원의 적지나 산의 절벽, 험한 바다에 빠진 불쌍한 영혼들을 많이 구원했다. 탐색 및 구조(search and rescue)는 헬리콥터 뿐 아니라 철학자나 비평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의 시간을 살짝 멈추고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찬찬히 살펴 본 (search, research, reresearch...) 후에 구원을 기다리는 의미들을 구출해내는 것이 철학자나 비평가의 일인 것이다. 이득영의 헬리콥터는 하버링 능력을 통해 한강의 다리들을 직상방에서 찬찬히 살펴보고, 개개의 특징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강의 다리들은 지도제작자가 본 것 보다 더 많은 디테일들을 제공해 준다. 다리의 관상학은 헬리콥터의 하버링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직상방에서 보는 시선은 다른 고정익 항공기나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시선이 가장 대중화된 것이 구글 어스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과 헬리콥터 시선의 가장 큰 차이는 헬리콥터의 시선은 지상과 언제든지 접촉이 가능한, 대지의 육체와 항상 맞닿아 있는 시선이라는 것이다. 즉 헬리콥터의 시선은 육화된 시선(incarnated vision)인 것이다.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종종 불행하게도 사고가 잦은 헬리콥터의 특성상 그 시선은 땅에 추락하는 순간 땅과 하나가 되어 지나치게 육화되는 단점이 있지만, 헬리콥터는 작은 땅덩어리만 있으면 언제든지 땅에 앉을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땅이라는 물리적 실체와 별개가 아니다. 고정익기의 착륙장치는 일정 조건이 갖춰줘야만 (활주로의 길이, 폭, 노면상태, VOR, 로컬라이저, 글라이드 슬로프 인디케이터 등 온갖 전자기기) 작동할 수 있는 아주 까다롭고 귀족적인 기계인 반면, 헬리콥터의 스키드는 일정 면적의 땅만 있으면 그것이 산꼭대기이건 하천고수부지이건 학교 운동장이건 특별한 유도장치 없이 아무데나 내려앉을 수 있는 대단히 잡식성의 기계이다. 그런 헬리콥터의 시선은 구글 어스의 탈육화된 시선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인공위성 사진이나 구글 어스의 이미지는 실제의 땅이 아니라 원근법이 사라진, 극도로 추상화된 데이터로서의 땅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계화된 시선이 가질 수 있는 극단의 지점이다. 반면, 헬리콥터의 시선은 내가 어제 운전하고 지나가던 바로 그 마포대교 북단의 혼잡상에 파묻혀 있다. 그리하여, 헬리콥터의 시선에서는 관찰과 성찰은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만져 볼 수 있는, 육화된 시선이다.

 

 

한강철교

 

 

1970년대 여성동아에 <하늘에서 본 내 고향>이라는 기사가 연재되었는데, 그것은 세스나기에서 찍은 지방도시의 사진과, 그 지방 출신의 문인이나 유명인사가 그 지방에 대해 쓴 글로 되어 있었다. 글은 지방도시의 시장, 학교 운동장, 골목, 도청 등 오밀조밀한 1970년대식 구조와, 거기 얽힌 개인적 사연들을 같이 보여주는, 오늘날의 구글 어스의 퍼스널한 차원이었다. 그 사진의 시선은 직상방이 아니라 옆에서 비스듬히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글도 사진 속의 지방도시를 바로 사진 속에 나타난 그 즉물적인 형태가 아니라, 약간의 세월이 경과한, 비스듬한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 비스듬한 각도가 친밀함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구글 어스도 비스듬히 보는 각도에서 찍은 사진으로 계속 업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보편적인 신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걸어 다닌 뉴욕의 길거리의 경험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구글 어스는 바로 여성동아의 <하늘에서 본 내 고향>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항공사진이 띨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차원이었는데, 이득영의 헬리콥터 시선은 직상방에서 찍은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다. 다만, 한강에서 자전거도 타고 사진도 찍으러 다니는 등 수시로 한강의 모든 디테일을 이용하며 즐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사진은 대단히 친밀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점에 그의 사진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헬리콥터의 하버링은 구조와 구출과는 상반되는 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전 때부터 미군은 헬리콥터에 무장을 강화한 건쉽(gunship)이란 것을 개발하기 시작하는데, 그 궁극의 형태는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과, 조종사의 헬멧과 연동되어 고개만 돌리면 포신이 조준되는 30밀리 기관포, 각종의 야간, 악천후 탐색, 항법장치로 무장한 오늘날의 AH64 아파치 롱보우이다. 구원이 곧바로 파멸을 의미하는 극단적인 변증법이 기계의 운명이기는 하지만, 헬리콥터의 경우는 정말 극단적이다. 아파치 롱보우의 하버링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유튜브에서 apache라고 쳐보면 금새 알 수 있다. 하늘에 가만히 떠서 이라크 저항세력을 사냥하듯이 하나씩 기관포로 분쇄해버리는 아파치의 영상은 헬리콥터의 하버링이 가지는 구원능력이 하나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하나를 없애버려야 하는 제로섬 게임에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 영상에서 가장 무서운 면은 저항세력은 이 쪽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당한다는 점이다.

 

 

동작대교

 

 

물론 헬리콥터라고 다 같은 헬리콥터가 아니다. 구원의 헬리콥터와 파괴의 헬리콥터는 설계사상도, 기능도, 소속도, 값도, 심지어 몸체에 색을 칠하는 원리도 다르다. 하지만 웃고 즐길 때가 아니다. 이득영의 헬리콥터 시선은 왠지 섬뜩한 뒷맛을 감추고 있다. 하늘로부터의 시선이 가지는 관음증적인 섬뜩함 말이다. 객관적인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과학과 기술도 있지만 무서운 파괴의 기술도 숨어 있다. 아마도 인간이 만든 영상 중 가장 객관적이고 차가운 것은 걸프전 때 레이저 유도폭탄에 달린 카메라가 보내온 모습일 것이다. 그 영상은 조준용 십자선 중간에 딱 놓여 있는, 극도로 객관적인 다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영상은 점점 다리에 줌인하며, 그 직후에 유도폭탄이 정확히 다리를 때려서 폭발하면 객관성이고 신화고 과학이고 실제고 풍크툼이고 주체고 뭐고 다 산산 조각나 버린다. 하지만 레이저 유도폭탄의 시선과 유도장치는 그냥 멀뚱히 객관적일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편견이나 주관도 없으며 의지도 없다. 객관성을 방해하는 유일한 요소는 약간의 오차이다. 모든 기계에는 오차라는 게 있으니까. 레이저 유도폭탄은 다리가 싫어서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목표에 호밍 (homing: 유도무기가 목표를 찾아가는 것. 호밍이라는 말은 home의 동명사형이다)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시선의 끝은 폭탄의 몸과 폭탄의 눈이 안락한 가정을 찾아들어가 칙 하고 화면이 끝나 버리면서 객관성이고 뭐고 다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이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선의 끝은 선이 아니라 점인 것이다. 순수한 과학이 순수한 파괴로 귀결되는 것이 오늘날 우울한 과학의 끝모습이라면 우리는 과학을 피해야 할까? 아니면 세미나를 하고 선언문을 내고 엠티를 하고 논문을 써내서 그것을 즐거운 과학으로 바꾸려는 지난한 몸짓을 해야 할까? 한강 다리는 오늘도 차와 행인들의 진동에 미세하게 상판을 떨며 대답을 주저하고 있다.

 

 

한남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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