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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쿤스트독 연례 프로젝트 The Flag Station 2012' - 2013'

 

 

 

The Flag Station, Painting

 

 

 

 

2013. 10. 25 Fri. - 2013. 11. 07 Thu.

Opening  10. 25 Fri. 5 p. m.

 

 

참여작가 | 박용일, 이보람, 이종구

비 평 가  | 고충환

책임기획자 | 김숙경

 

 

 

 

 

현실을 보는 눈, 현실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세 갈래 시선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현실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는가. 변하고 있다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이전에 작가들은 현실에서 시작해 재차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작가들은 가상현실(아님 대체현실?)을 전제하기 시작했고, 현실을 가상현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작업환경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로. 현실인식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로 채워지고(아님 아예 대체되고), 덩달아 창작 역시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술이 된 것일까. 현실이나 가상현실 모두가 현실이고 현실인식으로 볼 수가 있다면, 현실 내지 현실인식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까. 여기에 현실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아님 포개지면서 차이나는 세 갈래 시선들이 있다.

이종구. 다른 사람들이 도시의 현실을 그릴 때, 이종구는 농촌의 현실을 그렸다. 정부양곡 종이부대에 그림을 그렸고, 쌀자루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전상서와 월급봉투를, 무슨 철새나 되는 것처럼 잊힐 만하면 찾아오는 정치인들의 찢겨진 선거 포스터를 그렸다. 농촌의 현실을 증언하기 위해 그림과 함께 오브제를 도입해 실감을 더한 것. 그렇게 오지리 농부들의 삶이며 일상을 그렸고, 그들과 동고동락했을, 그네들의 살림밑천이면서 살붙이이기도 했을 소를 그렸다. 존재에겐 존재다움이 배어들고, 농부들에게선 농부다움이 묻어나온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입었던 꽃 분홍 문양이 프린트된 몸뻬 바지를 빨면 분홍색 물이 묻어나오고, 파란색 바지를 빨면 파란색 물이 묻어나온다. 아마도 농부 자신을 빨면 흙물이 묻어나올 것이다.

그 농부들의 들녘 위로 세계 최대의 항공사인 텔타 항공 소속 여객기가 날아오르면서 동체보다도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는 대개 전운과 전조 그리고 암운과 같은 좋지 않은 기운을 동반하고 암시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텔타 항공은 무슨 좋지 않은 기운이라도 몰고 오는가. 세계 최대의 텔타 항공기 밖으로 세계 최고의 기동 타격대 텔타포스의 낙화 꽃이 흩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동안 같으면서 다른 하늘에선 철새들의 대오가 또 다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과는 무관한(?) 농촌 들녘의 아침을 깨운다. 그렇게 작가는 오지리 농부들을 그리고 농부들의 들녘을 그리면서 그 들녘에 포개진 미국의 그림자를 그린다. 아마도 한미연합훈련을 그린 것이거나 그로부터 착상된 것을 그린 것일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때로 한미관계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 현실적이고 실감할 때가 많다. 그렇게 실감나는 현장 중 하나가 황해에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황해의 수평선에 맞춰 가로로 뉘어 그렸다. 이렇게 누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보루 내지 마지노선 같고, 철거되어야 한다는 코멘트 같고, 한미관계가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수평적인 관계로 고쳐져야 한다는 제스처 같다.

박용일. 작가는 재개발건축현장을 그린다. 왜 하필 재개발건축현장인가. 재개발건축현장은 작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풍경-바람 시리즈, 어수선한 풍경 시리즈, 종이배풍경 시리즈, 그리고 목련이 피기까지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줄곧 풍경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은 언제나 자연풍경이 아닌 재개발건축현장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담벼락에 빨간 페인트로 넘버링 된 어수선한 풍경 위로 바람이 분다.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 법칙의 바람이 불고, 살가운 삶의 풍경을 일소하고 천지개벽하는 광풍이 분다. 작가는 무슨 떡시루처럼 생긴 스트라이프 줄무늬의 가림 막 사이로 그 광풍이 흩어놓은 삶의 흔적을 본다(재개발현장을 임시방편으로 덮어서 가리는 가림 막과 타폴린 천은 그 이면에 도시의 부도덕과 불합리를, 폐해며 폐부를 숨긴다). 그 흔적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흔적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도(그리고 잊혀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작가는 그림 속에다 종이배를 슬쩍 밀어 넣는다. 종이배는 한때 그곳에 살았었을 사람들의 삶이며 꿈을 싣고 희망의 나라로, 좀 더 살만한 나라로 항해중이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광풍은 종이배라고해서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일소된 삶의 풍경이며 광풍에 휩쓸려간 종이배의 형해 위로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목련이 피는데, 세상사에 무심한 개화여서 더 화사하고 더 처연한 느낌이다.

미셀 푸코는 있으면서 없는 장소,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들지는 못하는 장소, 그래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소, 잠정적인 장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장소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군대와 감옥, 기숙사와 정신병원을 포함시킨다. 여기에다 재개발건축현장을 더할 수 있겠다.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이며 이행 중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장소 혹은 초장소에선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온갖 억압의 계기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인다. 억압의 저장고(폭탄?)라고나 할까. 그래서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의 계기를 본다. 어수선한 풍경이며 일소된 삶의 흔적 위로 흐드러진 개나리며 진달래며 목련의 개화를 이런 혁명의 메타포로 볼 수가 있을까. 아님 그저 세상사와는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한 자연의 본성을 확인시켜줄 뿐인 걸까.

이보람.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싫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윤리적 공감이며 참여적 연대를 호소해오는 것과 같은 양심에 가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인식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혹 불편하거나 불쾌해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예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이미지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좋다. 현실이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미지가 유해하거나 적어도 직접 해를 가해올 일이 없기 때문이며,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이 나의 현실이 아닌 너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너의 현실은 구체적 현실이 아닌 추상적 현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관한한, 그리고 너의 현실에 관한한 그 이미지며 현실은 폭력적일 수록 좋고 자극적일 수록 좋다. 너의 현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헤매는, 기꺼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줄 준비가 돼 있는, 권태와 무의미로 무장한 타임킬러인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구실이며 스펙터클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런 인식도 건드린다.

현실은 경험으로 축조된다. 그렇게 축조된 사람들의 현실은 좁다. 생활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좁아진 바운더리를 인식으로 채우고 확장한다. 현실인식은 직접경험으로부터도 오고 간접경험으로부터도 온다. 직접경험이 만들어준 현실인식의 영역은 자꾸 좁아지고(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권이 가속되고), 간접경험에 의한 현실인식의 범주는 점차 확장된다. 그래서 종래에는 마침내 간접경험에 의해서만 현실인식이 축조되고, 현실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한 인식만으로 대체된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현실을 현실 자체로서 경험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경험한다. 현실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을 본다. 이미지의 눈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것. 물론 현실과 현실이 반영된 이미지는 다르고, 앞으로도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공연하게는 이미지를 현실이라 생각하고, 현실을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미지는 현실인식을 삼키고 현실 자체를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작가는 바로 이런 문제 곧 사람들이 어떻게 이미지(그 자체 현실이 된)를 소비하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불현듯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 대한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소사이어티가 생각난다.

 

 

 

 

 

 

 

박용일(Park, YongIl)

 

▲ 박용일_ 종이배 풍경, 캔버스에 유화, 80.5×130.5cm, 2009

 

 

 

▲ 박용일_ 종이배 풍경, 캔버스에 유화, 112×162cm, 2008

 

 

 

▲ 박용일_ 종이배 풍경, 캔버스에 유화, 182×259cm, 2009

 

 

 

▲ 박용일_ 종이배 풍경, 캔버스에 유화, 112×162cm, 2009

 

 

 

▲ 박용일_ 풍경-스트라이프, 캔버스에 유화, 112×162cm, 2009

 

 

종이배의 기하학적 형태와 대조되는, 지워지거나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은 거친 바탕 면은 회화적 에너지가 직접 전달된다. 여기에서는 종이배 풍경의 특이한 구도에서 나오는 개념적인 재미보다는, 이전의 붓질이 마르기 전에 실행해야 하는 속도감과 호흡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어수선한’ 풍경에 적용된 속도감 있는 붓질은 개발을 위한 그럴듯한 가림 막과 중첩되기도 하고, 현대의 이동 속도에 의해 간과되는 풍경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용일의 그림에는 자연발생적인 동네가 인공 도시로 재구성되기 위해 가해지는 힘이 내포되어 있다. 전경의 옥수수 대와 원경의 아파트 촌을 대조시킨 이전의 [어수선한 풍경] 시리즈에서는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졌다면, [종이배 풍경]은 모든 것을 침수시키고 쓸어버리는 물의 파괴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은 바람이나 물처럼 자연력으로 은유 되어 있지만, 접는 힘은 분명 인공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켜켜이 남은 풍경들을 단번에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현대화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지역의 재개발 장면이라고 특정하기 힘든 현대화의 보편적 측면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2009개인전(목련이 피기까지) 서문 중 발췌

 

 

 

 

 

 

 

이보람(Lee, BoRam)

 

▲ 이보람_ 희생자-Pieta 2, Oil and Acrylic on Canvas, 193×130cm, 2013

 

 

 

▲ 이보람_ 희생자 3, Oil and Acrylic on Canvas, 193×130cm, 2010

 

 

 

▲ 이보람_ 피 흘리는, Oil and Acrylic on linen, 91×73cm, 2009

 

 

 

▲ 이보람_ 피 흘리는, Oil and Acrylic on linen, 91×73cm, 2009

 

 

테러나 전쟁보도사진이 작업의 1차적 자료가 된다. 2차적 자료는 사진으로 남겨진, 사진 너머의 현실이다. 나의 작업은 사진과 현실의 간극을 전제로 한다. 사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사진이 어떤 사건의 객관적인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사진은 현실의 완벽한 시각적 복사물이기 때문에 사진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더 나아가 ‘알았다’고 착각한다. 어찌 보면 목격 없는 사건이며, 사건 없는 목격이다. 사건과 목격은 서로를 지연시키며 허구화한다.

 

작업의 단계는 이렇다. 테러나 전쟁보도사진을 모으고, 분류한다. 희생자가 클로즈업된 사진들이 주가 되며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인해 일어나는 타지의 사건들이 소재가 된다. 현장과는 멀리 떨어져, 여기에서 구경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고 나와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사진들을 수집한다. 그렇게 모은 사진들은 기독교 종교화의 주제를 참고하여 ‘피에타’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애도’ 등으로 분류된다. 사건의 시기나 장소가 아니라 이미지의 유사성과 빌려온 이야기가 분류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첫 번째의 ‘지우는 과정’이다. 두 번째로 지워지는 것은 희생자의 피부색과 두 눈이다. 피부색과 두 눈이 지워지며, 희생자는 이름을 가진 개인에서 ‘희생자’라는 추상화된 범주의 대유가 된다. 마지막으로 성상이 되어 제단에 놓이게 되면서 이들은 ‘우리’의 공간과 현실에서 분리된다. 제단은 올리는 이들과 올려진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여 희생자들의 고통을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국 나의 작업과정은 사진을 바라보는 행위와 그 시선을 시각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의 시선이 가 닿아 변모된 희생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에 남게 되는 유일한 것은 희생자들의 몸짓과 표정이다. 이것은 내가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희생’이라는 옷을 입은 타인의 고통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장면도, 부모가 죽은 자식을 안고 있는 장면도 순간의 충격일 뿐, 나의 현실에는 무해하다. 성화의 주제를 빌려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화나 나의 그림에 존재하는 고통은 현실이 아니라 은유이며, 구경거리이다.

희생자를 둘러싼 공간은 따뜻한 분홍색으로 채워진다. 주변에는 손가락이나 인형의 것 같은 눈들이 떠다닌다. 분홍색은 값싼 동정심과 가벼운 죄책감, 무기력함을 반전하여 표현한다. 잘려나간 손가락은 검지(index finger)로, 눈과 함께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보는 행위를 상징한다. 고통을 겪는 그들과 구경하는 우리가 구분되는 현실에서, 가리키고 보는 것은 죄책감을 수반하며, 심지어 공격적이라고 여겨진다.

 

시각적 강렬함이 의미를 잃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그림에서는 사진 너머의 현실이 시선 앞에서 부서진다.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사진을 설명하는 캡션들도 단어들로 분절되고 뒤섞여 하나의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 (<애도에의 애도>, 2012) 나는 나의 그림과 작업과정을 설명하는 언어들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전쟁과 테러가,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격은 한 순간이고 기억은 희미해진다. 이미지가 다른 것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현실에서 이 과정은 무한하게 반복된다.

사진을 통해 보게/알게 되는 현실에서, 사건과 목격은 분리되어 있다. 있을 것 같은 의미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끈이 있을까? 애초에 그 끈은 착각일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붉은 피는 가장 나중에 그려진다. 실제 사진에서는 말라붙은 검은 핏자국이더라도, 그림에서는 빨강과 분홍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피는 나를 사진 너머의 현실과 다른 방식으로 이어준다. 붉은 색 피는 그려진 그 자체로서 나의 그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실제로 누군가가 흘린 피의 재현이다.

 

 

The primary source of my work consists of press photographs of war and terrorism. The secondary source involves the reality that exists beyond the photograph as well as the reality that was photographed. The prerequisite of my work is that there is a discrepancy between reality and photography. Photography alone is not sufficient to be objective evidence. However, since photography is a perfect visual duplication of reality, it allows us to delude ourselves that we are ‘seeing’ something, and even that we ‘know’ something. Maybe it is a happening without witness, or a witness without happening. Happening and witness defer each other and fictionalize each other.

 

Following is the stages of my artwork. First off, press photographs of wars and terrorism are collected and categorized. Most of them are close-up shots of the victims and depict happenings that take place in another part of the world due to the contradictions of human society. Being apart from the scene, I cannot help but merely look at it and collect the photographs that are not directly associated with me, or at least that are ‘thought to be’ not directly linked to me. These photographs are classified into ‘Pieta’, ‘The Descent from the Cross’ or ‘The Lamentation’ with regard to the famous themes of religious paintings. It is important that the photographs are grouped into categories not by the time and space of the happening but by the similarities of the images and the borrowed stories. This is the first step of ‘erasing’. It is the skin color and two eyes of the victims that are secondly erased. The skin color and two eyes are erased, and the victim is transformed from an individual with its own name into a synecdoche of an abstract category ‘Victims’. Finally, as the victims become sacred icons and are placed on the altar, they are separated from ‘our’ space and reality. The altar draws a clear line between the icons and those who place the icons on the altar, and eventually mythicize their pain and make it abstract.

 After all, my work is focused on the ‘seeing’ of the photograph as well as on the visualization of the sight. In other words, I depict the victim who is transformed as my act of seeing reaches out to him/her. The gesture and the face of the victims are the only things that are left in my artwork. And these are also the only things that I can see through the photograph. The pain of the others, which is attired in ‘sacrifice’, does not remind us of the reality. Even the scene full of blood, or the tragic scene where parents hug their dead son, is harmless to my reality. They are merely a shock for a moment. This is why I borrow the themes of religious paintings. The pain existing in the painting or in my work is not reality; it is a metaphor; it is a spectacle.

 The space surrounding the victim is filled up with pink. And eyes and fingers are floating around it, which look like those of dolls. Pink is an ironical expression for cheesy sympathetic feeling, a light sense of guilt and helplessness. The fingers that are cut out are index fingers and the fingers as well as the eyes stand for the action of meaningless seeing. In the reality where us, or the beholders are separated from the victims in pain, pointing at them and seeing them accompanies guilt feeling, and is even considered aggressive.

 Why is the visual intensity losing its meaning? In my work, the reality beyond the photograph is collapsed. The meaning disappears and there is only the shell left. The captions that describe the photographs are also divided into segments and fail to compose a complete sentence. (, 2012) I reckon, I can explain by the means of my works and the language that explains its working process how war and terrorism as well as the pain of the others are consumed under today’s media environment. Shock is a matter of a moment and the memory fades away. This repeats itself infinitely in the reality where the images are quickly substituted by others.

 In the reality that we get to see/know through photography, happening and witness are separated. And the meaning that is likely to exist is hardly found anywhere. Could there be something like a string between those are seen and unseen? Or would this be a mere delusion?

Most of the cases, the red blood is painted at the final stage. Even if it was just dried black stain of blood in the actual photograph, it is depicted with vivid red and pink. The blood links me to the reality beyond the photograph in a different way. The red blood, as it is painted, means my act of painting. However, at the same time, it is a representation of blood that somebody else out there actually bled.

 

 

 

 

 

 

 

이종구(Lee, JongGu)

 

▲ 이종구_ 농부, 한지에 아크릴릭, 162×97cm, 2009

 

 

 

▲ 이종구_ 빨래 1, 한지에 아크릴릭, 180×90cm, 2008

 

 

 

▲ 이종구_ 빨래 2, 한지에 아크릴릭, 180×90cm, 2008

 

 

 

▲ 이종구_ 다시 오지리에서-말마구지 사람들, 한지에 아크릴릭 꼴라주, 200×250cm, 2004

 

 

 

▲ 이종구_ 풍경-봄여름가을겨울, 한지에 아크릴릭, 145×290cm, 2008

 

 

 

▲ 이종구_ 황해,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130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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